PROJECT


프로젝트


신나라마당의 프로젝트는 정책마당에서 담쟁이들의 토론과 제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수정후재응모] 통일을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 (보편적외교의 이론구성~)

담당자
2019-03-08
조회수 399

1. 분단의 기원 - 손을 놓친 아이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바로 그 때 건설되었다면 장담컨대 분단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국세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라들이 세계를 재편했지요? 흔히 ‘서구’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표현하면 마치 그 상황이 동양과 서양 간의 한판 승부처럼 잘못 묘사되어 버립니다.

 

동양, 혹은 동북 아시아, 아니 그 당시 서구사회가 이루어 낸 두가지의 성취를 달성하지 못한 모든 나머지의 세계는 승부하는 입장이 아니라 재편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승부는 - 싸우기도 전에 - 판명이 된 상태였고, 다만 새로운 규칙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 가가 문제였지요.

 

전쟁을 통해 이익조정이 일어났다고 볼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갈등 중에 하나가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아편전쟁도, 병인양요도, 제너럴 셔면 호 사건도 동양과 서양의 싸움, 같은 우리 입장에서는 그나마 자존심이 사는 (사실 지금부터 쓰는 ‘우리’ 라는 표현이 대단히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우선은 그렇게 쓰겠습니다) 방식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한 쪽 사회에서는 농구를 다른 쪽에서는 배구를 합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성취를 달성한 쪽에서 터져 나오는 영향력을 전 세계에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 두 가지의 성취가 스스로 길을 닦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자 이제부터 농구하는 거야. 그런데 농구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쪽에서 농구를 하고 싶겠습니까? 배구하고 싶지. 그러나 농구를 하게 된 겁니다.

 

그 쪽에서 정한 룰대로요. 우리 쪽에서야 (자꾸, 이 ‘우리’ 라는 표현이 찜찜하지만 넘어가겠습니다) 배구를 했다고 자위하고 싶겠지만 그건 그냥 헛소리입니다. 농구를 억지로나마 한 겁니다. 다만 배구 하던 시절의 기술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농구에 새로운 기운을 넣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경기는 바뀐 겁니다.

 

제가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 혼란한 시기에 성립되었더라면 절대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이유는 그 경기의 룰이 바로 대한‘민’국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서구의 역사를 훑어보자면, 신정사회에서, 신도 싫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어, 왕도 싫다, 시민이 나서자, 하면서 (너무 축약했지요?) 현재의 근대국가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요소, ‘자본주의(경제적 민주주의)’ + ‘민주주의(정치적 자본주의)’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이는 이 체제가 달성되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싸우고 다쳤습니다.

 

몇 천 년에 걸쳐 일어난 이 변화가 동양에서는 ‘없는 일’ 이었습니다. 배구를 계속한 거지요. 서로 코트가 다르기만 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웬걸 서양에서 온통 지지고 볶으면서 농구를 발전시키다가 어느 순간 전 세계를 ‘접수’해도 될 정도로 힘이 넘친 것입니다. 그래도 배구를 계속하자. 위정척사파입니다. 상대 쪽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이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유지하자는 소리‘처럼’ 들리니 그래도 혹하긴 합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안타깝게도 그 ‘자주성’이라는 것은 농구를 해야 획득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ID가 없으면 그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세상은 농구경기를 하는데 혼자 배구를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현역 선수처럼 보이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있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억울한 느낌이 들어도요.

 

당시 대한제국. 몇 백 년 동안 외교권도, 국방도 중국에 의존적이었던 나라가 농구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합니다. 답은 뻔히 보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배를 몰고 와서 얼른 문 열라고 하는 나라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무지 넘볼 수 없는 힘을 키운 나라들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다소 전문적인 부분이니 저도 좀 조심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경기의 룰은 간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왕이, 어이구 날씨 덥다, 연못이나 지어볼까, 하는 식으로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물론 그 탐욕은 대단히 많은 병폐를 낳지만) 그 자본마저 경제규칙 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프로테스탄티즘이 괜히 돈 문제를 건드리는 게 아니지요). 아이 같은 왕의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이성 속에서 말이지요.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야 한다면 자본주의 자체조차 아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규칙을 잃은 자본은 자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탐욕이죠.)

 

그렇다면 그 규칙은 누가 제정하죠? 의회, 국민의 민의를 담은 의회에서 만듭니다. 이것만 해내면 됩니다. 한 국가 내의 모든 힘을 다 끌어 쓸 수 있는데, 100점 만점에 100점 할 수 있는데, 분명히 이러면 세계 질서 내에서 양아치처럼 설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품위를 가지고 ‘이 땅은 우리 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러나 몇 천 년 동안 한 번도 농구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해본 사회가 쉽게 바뀌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왕은 왕대로, 내가 왕인데! 이러고, 억지로 의회를 만들었는데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에이 그래도 나는 양반인데, 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농민들은 농민대로 차마 왕까지 어찌하진 못하고 민주주의적 역량은 왕정의 틀 안에서 곪아버립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미래가 과거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정치가 미래보다 작으면 국가는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냉엄한 국제질서는 그런 사정까지 보아주진 않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보셨겠지만 100의 힘을 낼수 있는 사자가 어찌된 일인지 30짜리의 힘으로 비실비실 거리면 그대로 ‘나가리’입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였습니다. 근대를 돌파해 낸 힘이 전세계를 뒤덮던 시절입니다. 군국주의의 광기로 100을 120으로 만들어낸 일본(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게 대단히 무섭지만), 그래도 쌓였던 힘이 80은 되었던 중국과 달리,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정의와 도덕, 개혁, 모든 ‘선한 가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정의와 도덕, 개혁, 그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너무도 절실하게 우리는 100을 100으로 소화할 수있 는 체제를,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발휘되고 그 힘을 갈무리 할 수 있는 체계를 구현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분단을 피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근대국가가 성립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대한제국이라는 중세국가 말고, 대한민국이라는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어엿한 독립국가가 있었다면 설사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탐욕이 그토록 강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힘에서 한발 떨어져 우리 나름의 미래를 만들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중화의 자족적 환상에 빠져있던 조선은 (서양 오랑캐 어쩌고 저쩌고...)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가 그제야 아,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자각을 하던 때였습니다. 자각은 좋지만 경기 도중에 자각을 해야 할 정도라면 이미 무언가가 대단히 잘못된 상황이었던 것이겠죠. 우리는 패배를 예감한 승부 속을 헤맸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분단이 된 건 그 시절 국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도 국가 아니냐, 말하실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있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놓치고서 다른 국가들의 영향력 속에서 뿌리 잃은 수초처럼 떠다닌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야, 너 허리부터 반으로 자르는 거 어때? 라고 물었을 때, ok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자기결정권도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2. 답은 정해져있다 -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

 

그래서 저는 한반도의 현대사를 ‘역사적 공백지점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노래도 있죠?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해’.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달성했어야 했던 그 지점. 그것을 향한 피흘리고 다치고 죽고 싸우고... 몇 천년의 역사공정을 몇십 년만에 해내는 과정. 그 때의 울분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세계 질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이미 나라는 반토막 나고, 도저히 복구되지 않을 것 같은 상처까지 입었지만 그래도 기어코 다시 소설을 다시 써보려는 과정, 그러니까 서사를 쓸 수 있는 주체가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끝내 실현하는 과정 말이죠.

 

대한민국임시정부부터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감탄하는 부분이라 해야할 지, 안타깝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좀 이상하다고 해야할 지 모르겠는 부분은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존재한 적이 없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상실된 나라가 있고, 그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임시정부가 있는 게 좀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하지만 한반도의 특수성은 독특한 지점을 낳습니다. 회복해야 할 근대독립국가가 성립된 적이 없는 상황에서 식민지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이 점 때문에 일본의 급작스런 항복선언에 김구 선생님께서 대단히 낙담하신 것입니다. 광복군이 ‘있었던’ 나라의 군대처럼 활동하면서 한반도를 향해가야 전후에 한반도의 주인이 되어야 할 국가가 있게 되는 셈인데, 엄밀히 말하면 무주공산인 한반도가 된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이 대한제국 성립시점에 성립했더라면, 전후처리는 그래도 간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대한민국이 있었지, 그럼 그 쪽으로 한반도가 가야지, 하면 되는 거지요. 근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남북분단 자체를 문제로 보기 이전에 왜 엄연히 다른 국가인 미국과 소련이 그렇게 쉽게 한반도에 세력화를 할 수 있었는 지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내용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있어야 했던 것’을 추구해야 했던 거지요.

 

제가 앞의 단락에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열하며 강조했던 부분도 바로 이런 문제와 맥이 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이 대한제국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는 사실은 임정 관계자 분들께서 아마도 이 지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있었어야 했던 나라였지요. 조금만 더 양보해서, 대한제국까지는 그냥 그렇다 치고,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변한 상태였다면. 그러한 식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커다란 아쉬움이 배여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회한만 할 수는 없지요. 이미 물은 양껏 엎질러졌습니다. 잠깐 주도권이 없었을 뿐인데, 식민지에 분단에 전쟁에 삼연속 콤보가 우리를 때렸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만들지 못한 업보 혹은 당연한 인과관계였는지도 모릅니다. 잘못한 만큼 매는 맞았으니, 할 거 해야겠지요.

 

자본주의는 했습니다. (뒤에서 적겠지만 사실 저는 이것도 이제부터, 2017년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과하게 한 것 같기는 해도 어쨌든 했습니다. 자 그럼 두가지 과제 중 한 개는 했는데, 나머지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민주화입니다.

 

잠깐 눈을 돌려서 동북아시아의 지형을 살펴봅시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는 거지요. 두가지 질문을 해봅시다. 1) 자본주의 했어? (사적 소유가 가능해?) 2) 민주화 했어? (너희들 너희 손으로 너희가 원하는 최고지도자를 뽑을 수 있어?) 결과는 이렇습니다.

 

대한민국 ○○(촛불!)
일본 ○△(천황! 자민당 장기집권!))
중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굳이 북한이라고 표현하지 않겠습니다) ××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 같아도 막상 이 과제가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것인지 한 눈에 보입니다. 가끔 코딱지만한 나라 운운하며 대한민국을 까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 간단한 테스트를 기어코 통과해낸 나라가 동북아시아에 사실상 대한민국 밖에 없다는 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국뽕을 좋아라 하지 않지만, 지금은 잠깐이나마 마음껏 국뽕 한사발 들이마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5,000년 역사의 내공에, 쑥과 마늘을 100일 먹어도 화내지 않는 웅녀의 인내심에다가, 두 유 노우 캉남스타일, 큄치,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촛불입니다.

 

2017년은 그저 그런 해가 아니라 아마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된 것이라고 저는 자신합니다. 단군보다 더 중요한 집권세력이 나타난 때이니까요. 300년 쯤 지나서 역사가들이 한반도 역사를 기술한다면, 사실상 2017년을 대한민국의 건국 (1948년을 건국으로 보려는 얍삽한 시각말고요) 원년으로 보려는 시각도 존재할 거라고 자신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가 완성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최초로 시행된 민주주의제도는 미국으로부터 이식된 것이지요. 일단 국민들한테 권력이 가고 그 다음에 국민들이 대표를 선출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역사는 이론 같은 건 관심이 없나본지 이런 식으로도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민주주의 제도부터 시작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야 아마도 원래 자기들이 하던대로 한국을 제도화하고 싶었겠죠. 여행가도 김치 챙겨가는 거랑 비슷한 심리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되어야,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거죠.

 

혹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쪽으로 뻗어왔다라고 판단할 수 있겠죠. 저는 후자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명도 생명처럼 번식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풀이 심어진 것과 토양이 바뀌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일단 잘 모르던 풀이 심어졌으니 흙도 그 나름대로 대응책을 찾기야 하겠지만 토양이 완전한 형질변경을 이루어내는 건 차원이 다른 겁니다. 왜냐하면, 토양이 스스로 바뀌어버리면 그전까지와 다른 풀까지 알아서 키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k-pop이 전국구가 된 건 서구, 그러니까 ‘보편적인’ 리듬과 멜로디 감각을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전국구, 그러니까 당당하게 세계의 일원이 되려면 이 과정이 필수였습니다. 안 그러면 영원히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는 거지요. (2002년 월드컵 때 거리로 다 뛰쳐나간 거대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 개인적으로는 ‘뭔지는 몰라도 이젠 우리도 세계의 일원이야!’라는 자기선언 같은 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촛불입니다.

 

우리 흙 속에 내재해있던 민주화의 역량이 폭발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서구에서 유래했긴 했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을 누리고 싶다라는 열망은 보편적이니까요.) 민주주의 제도를 타고 들어온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제도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차원으로 도약했습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영원한 형질변경입니다. 우리는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이제 우리에게 제도가 아니라, 성질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했던 역사의 공정이 4.19를, 5.18민주화운동을, 6월 항쟁을 거쳐 이제 완성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찾는 과정. 뜻이 몸을 갖는 과정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까지의 한반도의 현대사는 ‘역사적 공백지점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절반은 복원되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국가입니다.

 

어떤 강력한 규칙을 들이밀어도 우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국가’입니다. 우리는 정체성이 없어(당연히 우리탓이지요) 휘둘리고 휩쓸렸던 시간을 지나 이제 그토록 갖고 싶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이 얼마나 값진가요? 한국은 이제부터 대한‘민’국입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양심에 비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제도 또한 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자본에 규칙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3. Not Unification, But Identification

 

하지만 아직 반쪽입니다. 아직 100점 만점에 50점입니다. 우리는 통일 이전의 있었어야 했던, 있을 수 있었던 대한민국을 통일로써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통일은 해야지, 말이야 쉽지만 무엇 때문에, 라고 생각을 해보면 막상 답이 안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통일을 해야합니다. 잘못되었던 역사의 공정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지금까지 제가 써내려간 말들이 진실에 부합한다면 저는 이러한 세계관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싶습니다. 앞뒤를 바꿔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세계관이 우리에게 이로운가? 나쁘지 않다는 제 나름의 판단이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에게 한 번 던져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괜찮나요?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이론’을 구성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한국보다 북한 주민들(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들)이 겪고 있을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주민들이 마주하고 있는 딜레마는 바로 정체성혼란 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북한정부가 붕괴되면 북한주민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안타깝지만 ‘또’ 무주공산입니다. 대한제국 >> 일본 식민지 >> 급작스런 해방, 그 때의 국가부재상태. 또 그 상태입니다. 현재의 북한정권이 어떤 식으로든 유지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한국은 ‘대한민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이 ‘대한민국’은 어떤 식으로든 영구합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어떤가요?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 현재의 북한정권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건 소속될 수 있는 더 큰 정체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리 그러한 공간을 우리가 상정해 놓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한)한국 >> 대한민국

 

역사의 공정을 구성해 놓은 상태에서 과감하게 우리는 대한민국을 준비해놓고 있어야합니다. 헌법 4조, 한반도를 포함한 부속도서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우리는 촛불이후의 대한민국, 아직까지는 휴전선 아래까지 집권하고 있는 바로 그 대한‘민’국을 의미합니다. 그 조항은 북한 정부에 시비나 걸라고, 홍준표 기분이나 좋자고 만들어 놓은 조항이 아닙니다.

 

통일부는 사실상 북한정복부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쓰잘데기 없는 동작은 그만두고, ‘미래통일부'로 바뀌어서 대한민국의 그림을 미리 그려놓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후의 세계까지 흡수한 대한민국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통일부는 존속해도 되고, 또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국제질서는 남과 북이 엄연히 별개의 국가인데 엉뚱하게도 마치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인 것처럼, 남들 농구하는데 혼자 배구하자고 어깃장 놓는 짓은 그만해야 할 것입니다.

 

통일이 나빠서도 아니고, 과거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런 식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원이고 국제법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게 주체성입니다.

 

다시 북한 주민들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가보자면,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권이 없어도 ‘주체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병적인 주체성이 아닌, 더 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정권과 주민들은 대단히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같은 김일성, 어머니 같은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은 가계로만 따지면 주민들과 동일한 항렬이니, 조금씩 밀착감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형제보단 부모에 대한 애착이 맹목적이지요)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나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로.

 

보편적인 외교. 우리가 벨기에를 대하듯, 뉴질랜드를 대하듯. 그 세계로 가야합니다. 우선은 그게 출발입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운 건 죽일 듯이 싸운 거니까, 온도를 식힙시다. 남보다 못한 사이보단 우선 남이 됩시다. 남이 되야 다시 친해질 수라도 있죠.

 

그리고 그 보편적인 외교관계 속에서 우리의 청사진을, 대한민국의 구상을 전합시다. 물론 직접적으로 전하면 안 되지요. 당연합니다. 그건 북한주민들 모르게 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은연중에 알아서 전달되겠지요. 보편적인 외교관계를 하면서 경제협력·문화교류를 해나가는데 분명히 북한정권을 붕괴시킬 뜻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한‘민’국으로 연착륙 시키는 더 합당한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정권이 도덕적으로 뛰어난 정권이라서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조선’이 끝을 맺는다는 느낌을 제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주민들은 근대 이전의 세계를 잊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수한 문제들의 원인처럼 보이는 것 속에 숨어있는 진짜 이유는 그게 다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지 않아도 그냥 정체성이 확보되던 시절. 하지만 그 시절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도약이라는 방식으로 그 세계를 벗어났지만 북한은 몰락이라는 방식으로 그 세계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소 관념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자랑스러운 건 우리 시민들 쪽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반드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도 있지요. 대한민국은 반이 건설되었습니다. 나머지 반을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