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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포럼


[안전]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1

담쟁이
2017-05-17
조회수 1026

■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1 ■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일본 정부의 대처는 어떠했던가? 일본정부는 진정으로 50여 개의 원전을 관리할 능력을 갖고 있는가?

일본 정부는 3월 11일 16시 36분 원전의 전원상실 상태의 보고를 받은 후 원자력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대상구역 국민들에 대해 옥내 대기를 명했다.

도쿄전력이 3월 12일 오전 3시 1호기 격납고 파열을 피하기 위해, 격납용기의 밸브를 열어 노심으로부터 방사성물질을 포함한 증기를 대기 중에 배출시켜 격납용기 내부압력을 낮추는 벤트작업을 실시하겠다는 의뢰를 했다.이 때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알리기 전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7시 11분, 간 총리는 벤트작업 실시를 앞둔 사고현장에 도착했지만, 작업 준비는 돼 있지 않았고, 현장소장인 요시다 마사로(吉田昌郎)는 간 총리 방문에 쫓겨 2시간 동안 지시조차 못 내렸다.

또한 매뉴얼도 없고 고농도 방사선에 현장이 오염되어 벤트작업은 난항을 거듭하다 14시 30분에야 시작됐다. 벤트작업 실시 후 수소폭발이 발생해 방사성 물질이 흘러나가 반경 20킬로까지 확대됐다.

3월 15일 오전 3시 시미즈 마사다카(清水正孝) 도쿄전력 사장이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경제산업성 장관에게 사고현장에서 작업인의 전면철수 의향을 밝혔지만, 장관은 이를 거부했고 간 나오토 총리도 「철수는 있을 수 없다」고 압박했다.

그 후 자위대원과 소방대원을 동원한 격납고 냉각을 실시하다 방사선에 오염돼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아 결국 최악의 사태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전체를 방사성 오염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후쿠시마현 가와우치무라(川内村) 촌의회 의원인 니시야마 치카코(西山千嘉子)는 원전에 파견돼 작업하던 사람들 10만 명 중 4%인 4,300여 명이 사망했는데 정부와 도호쿠다이가쿠(東北大学)병원이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을 다 믿지 않더라도 800명 사망 등의 이야기가 나돌고 있어, 후쿠시마원전 사고로 인한 인적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방사선 공포 속에 일본 정부는 5월 6일 도카이(東海) 지진에 의한 쓰나미 위험이 예상됨에 따라 시즈오카현(静岡県) 하마오카(浜岡) 원전의 가동을 중지시켰다. 또한 5월 24일에는 내각 관방에 후쿠시마원전 사고조사∙검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6월 22일에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발전설비의 안전을 위한 「안전설계 심사지침」과 「내진설계 심사지침」의 근본적 개정에 착수했고,

이 위원회는 2012년 9월 원자력규제위원회로 재탄생하며 여기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새로운 규제기준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일본 정부와 원전 관계자는 전원이 상실할 것이란 점은 아예 매뉴얼에도 존재치 않을 정도로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 안이한 대응을 했다.

사실 일본이 어떤 나라인데 매뉴얼이 없을 리 만무하다. 후쿠시마원전 내에는 증후 베이스, 시비어액시던트 베이스의 매뉴얼이 존재했다. 이 매뉴얼은 원전 운영반이 관리하는 것으로 만약 운영팀이 대응했다면 최악의 사태는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수반에서 계속 일해 온 요시다 소장 지휘 아래 진행됐던 대응팀은 매뉴얼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요시다 소장 등에게는 그 매뉴얼이 무용지물이었으며 사실상 그들의 뇌리에는 매뉴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매뉴얼대로라면 벤트작업이 아니라 바닷물 냉각을 시도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전 사고 대응팀뿐 아니라 일본인에게 매뉴얼에도 없는 일이 닥치자 소위 ‘멘붕’ 상태가 된 것으로, 전원상실로 인한 수소폭발과 방사능의 대기 중 노출을 예견조차 못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문제가 발생하고 확대되고 있는 것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미국이 원전 멜트다운 시지원과 관계자 급파를 이야기했지만, 일본 정부의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관방장관은 극구 반대했다. 이미 요코스카(横須賀) 미군기지의 미국 장교와 가족들이 출국하고, 방사선 장애를 예방하는 약인 「안정질소제」가 배포되는 정도까지 확대돼 미국은 일본 정부의 수습책에 문제를 느끼고 미국의 전문가를 관저에 파견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때 에다노 장관은 주권을 이유로 거부했고, 이를 둘러싼 소위 에다노 장관과 룰스 미 대사와의 싸움(3월 14일 밤 11시)으로 일컬어지는 미 일 간의 대립은 미 일 동맹을 위협할 정도였다고 전해졌다.

『문예춘추』 2013년 6월호에 따르면, 당시 간 나오토 수상은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해 긴급사태가 벌어졌는데도 도쿄전력이 철수하고 자위대마저 손을 들 경우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이고, 일본 북부의 오염으로 인해 러시아까지 행동에 나설 경우에는 나라를 빼앗길 것, 소위 「일본 침몰」을 이끈 수상으로 기억된다는 극단적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